낭만적(?) 일상/책과 영화

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책, 나를 찾아가는 철학여행

Soo♥JJeong 2020. 11. 1. 00:43

독서모임 10월의 책은 '나를 찾아가는 철학여행'이다.

책 표지. '나'를 그리는 '나'의 모습이 서로 뫼비우스의 띠같이 인상적이었다는 조이님의 말이 더 인상적.

 

정말 오랜만에 철학자들이 잔뜩 나오는 책을 읽었다. 나이가 든걸까, 아니면 책이 쉽게 쓰여진것일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누군가 그랬다. 강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알려주려고 하지만, 강의를 오래 한 사람은 청중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을 강의한다고. 이 저자는 적어도 강의를 처음 하시는 분은 아닌것 같다.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인상깊었던 문장들, 그리고 요즘의 나의생각 몇 가지를  남겨놓고자 한다.


3장. 타자는 내 운명


부모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연인과 연인의 관계에서도 상대는 자기에게 타자일 따름이다. 타자가 나의 논리에 맞추어 순순히 들어온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들어오지 않는 부분을 강제로 내 쪽으로 들어오려 하면 강제와 폭력이 발생한다. 타자를 자기의 논리에 끼워 맞추려해서는 곤란하다. 타자는 타자 고유의 삶이 있으며, 이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내 주변에는 솔로인 괜찮은 여자분들이 몇 있다. 최근 만난 두 명에게서 이상형이 '나를 나로 인정해주고, 바꾸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바꾸려 한다며. 다른 시공간에 있던 두 사람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으니 아직 많은 연인들이 서로를 구속하며 자신이 원하는 '상'으로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는것을 새삼 느낀다. 나와 나의 배우자는 어떤지 돌이켜본다. 나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남편은 나를 바꾸려하지 않는것 같다.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지만, 배우자를 나와 다른 '타자'로 인정한다는 것. 쉽지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꼭 어려운일만은 아닌것 같기도 하다.

 

타자가 지닌 기호의 의미, 즉 시니피에가 아니라 기호의 표시 즉 시니피앙에 따라 내 욕망의 성향과 방향이 결정된다는 라캉의 주장은 개인이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에게 '시뮬라시옹'의 저자로 잘 알려진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소비, 즉 상품구매 행위는 상품 자체가 지닌 실질적인 사용가치(시니피에)가 아니라 상품의 소비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표시(시니피앙)를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략)...

소비자는 특정 상품을 구매해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아니라 타자(기업)가 만들어낸 기회의 사회적 의미에 편승한다. '명품'이라고 알려진 것을 향해 우리의 욕구는 줄을 선다. '명품'을 착용하면 나는 명품이 된다. 여기서 나는 사라지고 타자만 남는다. 나의 욕구를 타자가 결정한다. 그런데도 소비자인 나는 그 욕구가 나의 욕구인양 착각한다.

나의 취향, 기호, 욕구 등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나의 밖에서 밀려오는 타자적인 욕구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조장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 삶을 내가 살지 못하고 타인의 욕구에 내 삶을 맡기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 문구에 많이 공감했다. 어쩌면 어렸을 때 읽어보려고 시도했던 '라캉'의 시니피에, 시니피앙을 '소비'라는 익숙한 행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신기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읽고나니,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든다. '취향'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며 취향이 있다는 것은 해당 카테고리 내에 무엇이 있는지 인지한다는 것이 아닐까? (인지와 흥미의 순서가 바뀌더라도 취향이 되기 위해서는 인지, 흥미는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남들이 하는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를 단순히 따라 구매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 될 수는 있겠지만, 최근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가치소비'를 생각하면 저 내용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닐까 싶다. (가치소비마저 타자적인 욕구라고 칭하는것은 아니겠지...)

 

 

 4장. 나를 키우는 경험

3장에서 나의 욕구는 타자의 욕구에 의해 결정된다던 저자는 조금 다른 입장의 문장으로 4장을 연다.


나는 타자를 향해 있을 필요가 있다. 타자를 거치치 낳고는 내 안에 무엇이 잠재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는 나를 일깨우는 매개자다.

저자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되, 타자에게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의적인 해석을 해본다. 4장은 '경험'에 관한 내용이다.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를 성장시키는 건 아니다. 경험의 양이 아니라 질이 관건이다. 어떤 경험이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 경험은 나의 성장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무조건 많은 경험이 능사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내 안에 불이 켜지듯 '반짝!'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성장하려면 경험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부단히 내 안의 수용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놀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주어진 현상을 놀랍게 바라보고 느낄수록 나는 그만큼 더 성장할 수 있다.
놀랄 줄 모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 놀랄 준비가 되었을 것! 그래야만 밖에서 무언가가 들어왔을 때 '반짝!'하는 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통해 나는 새로운 의미를 삶에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많은 위안을 준 부분이다. 나는 회사에서 데이터를 보고, 의미있는 것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쓴다. 나에게는 너무 놀랍고 신기한 분석결과인데 팀장님은 전혀 그렇지 않은 눈치다. 뭔가 전략적 프레임 속에 논리적으로 쓰여있는 내용만을 기대한다. 반면 상무님은 '놀랐다'라는 표현을 쓰신다. 놀랄 준비가 되어있고, 놀람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 그 차이가 직급의 차이가 된 것일까.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참 많은 차이가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오랜만에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을 만났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은 흔치 않다. 조금은 내가 성장한 느낌. 철학에 관심있다면 정말 추천한다. 독서모임에서 언급되었던 다른 책들도 함께 같이 읽어봐야겠다.